자존감 높이기? 중요한 사실 1가지 알려드립니다.

요즘은 ‘앞으로 개인들이 더욱더 외로워지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존감 높이기‘라는 키워드가 많이 검색되는걸 보면 더더욱요.

우리는 지금 보여지는 것에 가치를 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얼만큼 서로한테 진실될 수 있을까요?

이거 어쩌면 굉장히 좀 짜증나는 얘기인데

‘자존감 높이기’의 조건은 어떤 특별한 조건이 아니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자, 보세요. 우리 주변에 야, 연인, 어쨌든 부부가 됐든 얼만큼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근데 속 깊은 얘기를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 어느 순간에 틀어지는 경우가 더 생길 수가 있거든요.

이거 뭐랄까 어차피 세상에 이렇게 가버릴거면, 왜 우리 세대가 지금 지금 연애 안 한 세대잖습니까.

자존감 높이기? 사람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2030세대가 결혼을 안 해요.

근데 과연 우리가 이렇게 누굴 만나고 이런 거에 대해서 지금 우리 모두가 지금 큰 의미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근데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게 무엇에서 의미를 잃어버렸을까요?

‘미래가 안 보인다’는 거는 지금 이 현재 똑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될 거라는 그런 시뮬레이션때문이거든요?

뭐 서로가 안 좋은 상황에서도 같이 으샤하면서 뭔가 상황을 뒤집어볼 수 있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근데 그럴 수 있는 게 거의 정말 힘들죠.

빚 이라도 없으면 다행인데 빚이 너무 많아.

아파트 한 채는 고사하고, 자기 누울 데 찾는데 그렇게 찾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있을까요?

이런 생각이 들은 사람들한테 과연 노력을 강요하는 게 맞을까요?

열심히만 살면 된다. 근데 열심히 뭐가 살았다고 쳐보죠.

근데 다들 쭉쭉 쳐져 있으면 얘기할 말도 할 맛도 아니고 뭐. 야, 나는 이렇게 노력을 노력했으니까 너는 이렇게 노력을 덜 했네.

네가 잘못된 거 아니야? 이런 얘기 얘기밖에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우리가 얘기를 하고 교감하고 공감하면서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상호 작용을 하는데, 이게 점점 어느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배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가 됐다는겁니다.

지금 이제 사람들 어떻게 만납니까? 나중에는 답장도 ai로 보내게 되는 것 아녜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내가 가진 모든 나이 외모직업어떻게 내가 가진 모든 거, 이런 것들이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의 이 집단 무의식을 통한 아바타가 나를 대신하는 겁니다.

중요한건 ‘진짜 나는 어디 있을까?’ 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진짜 나를 알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자존감 높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는 척 하지만

사실은 외면하기도 합니다.

왜 무섭거든요.

나를 안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까요?

이거 이거 내가 내 솔직하게 나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누구나 알아줄까요?

안 알아줍니다. 혼자 썡쇼하네 해요.

근데 들어봄직은 하잖아요.

듣는 귀가 과연 몇 개나 될까요?

내 얘기를 과연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

아니면 뭐 자기 얘기를 하잖아. 사람 사정 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으니까요.

근데 야, 참 이 사람이 이럴 수도 있겠다 라는 것

덤덤하게 얘기하고 얘기를 안 들어오니까 얘기를 못하겠지 또 다들 이러쿵저러쿵뭐 자기 이렇다 저렇다 뭐 이렇게 얘기하니까 특히 싫어질 수도 있고 지금 집단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업플즈는 말하자면 감정에 있습니다. 성적 소수자 같은 거야.

야, 누가 우리가 결혼을 하던 뭐 저기 가족끼리 만나고 뭐 친구끼리 만나건 뭐 그래.

서로 어떤지 모르든 채 만나는 거예요.

그게 너무 아이러니인 겁니다.

서로를 모른 채 만나, 그냥 만나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으니까.

근데 그게 삶의 어느 한순간에 폭발해 우리는 서로 만났을 때 서로 상처를 주고받아.

근데 그걸 참고 살지.

자존감 높이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오히려 덜 그럴수도 있어요.

근데 덜 그러는 게 어쩌면 더 어려습니다.

지금 안 보면 되고 안 만나면 되고.

지금 또 안 볼 수밖에 없어요.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러니까 점점 뭐랄까 관계에 있어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달까요?

그니까 입장을 잘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생생하게 살거냐 생생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냥 일순간에 호르몬 분비작용으로 생생하게 사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집단이 가는 대로 사는 겁니다.

어쩌면 그런 왜 아 인생이 꼬인 사람들은 궤적의 뒤틀린 사람들은 이게 자기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없어서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좀 그런 측면인 것 같아요.

사람이 잘 살았는지 못살았지는 아무도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존감 높이기 위해서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봐라 말라는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판단할거에요?

저 자신 자기 자신을 알아도 그게 어느 정도까지만 아는겁니다.

완전히 알 수가 없어요.

자존감 높이는 방법?

많은 분들이 스스로를 알고 사랑할 줄 알면 자존감 높이기를 수월하게 할 수 있다고 하죠.

내가 나를 안다고 하는 거는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알아가지는 거고.

그리고 모름을 통해서 알아지는거에요.

말이 좀 어렵죠?

좀 재미있는 예를 실질적인 예를 더불어 들어봅시다

누가 나를 보고 내 인생 못살았다?

그러면 그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근데 반대로 너를 보고 너 왜 그렇게 살어?

지금 이 나이 먹고

나 한테도 너 지금 이 나이 먹고 왜 이렇게 살아?

라고 하면 서로 피차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근데 그, 그 말의 전제를 살펴봅시다.

그럼 공격하는 행동인거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누가 잘해 잘살았다 못했다.

그냥 잘 못 이런 걸 따지는 것 자체가 그니까 더이상 확산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사람 애초에 그냥 판단을 내리고 싶은 거고, 그 다른 사람의 판단과 그 잘한 사람이 어떤 그렇게 판단을 내린 과정을 통해서 자기 삶을 어떻게 일정 부분 보상받고 싶은 이십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사람은 어떻게 무슨 대화를 해요?

그러니까 이런 거를 뭐랄까, 민감한 캐스트하는 게 어쩌면 일종의 언어민감도로 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턴 편의상 반말로 진행해볼게요.

잘 봐봐, 잘잘못따지고 옳고.

그러면 너 왜 그랬어?

이렇게 할 말이 없는 거야.

이렇게 내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런 것 같은데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냐?

그러면 앞으로 이거 이거 어떻게 수습할까?

얘가 아니잖아 뭐 이렇게 하던가 하든가 뉘앙스를 알겠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알고 싶잖아.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그랬잖아.

근데 그게 네 주제 파악을 해라.

뭐 이런 얘기가 아니라 야, 나도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이 얘기하고 있는 거야.

복잡하지.

근데 우리는 지금 ‘아는 척’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

그 얘기 아나?

이해를 하면 이해에 갇힌다

내 언어가 꼭 다 내 전부는 아니야.

나는 지금 현재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 상호작용하는 과정 왜 형이 인출하라 그러는지 알아?

알아 가는 거지?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내가 죄를 알았다 해도 나는 모르는 거야.

왜?

제도 자신에 대해서 모르거든.

나는 현상만 알 수 있어.

자신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자기에 대해서 아는 게 사실은 무섭지 않을까?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뭐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

도대체 안다는 게 뭘까?

왜 이런 게 있거든.

자유는 내가 자유를 안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부자유와 자유 사이의 경계까지가 내 자유거든.

그러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히 솔직히 안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아 그렇게 사이코패스처럼.

근데 뭐 그렇게 살기에는 뭐 우리 같은 타입들은 호기심과 알고 싶은 거에 대한 욕망이 굉장히 강한 타입들이겠지 난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저는 생각해.

그러니까 내가 도대체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까?

아, 나는 여기까지밖에 몰라.

근데 차라리 나에 대해서 조금 이만큼 솔직한 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홀가분하니까.

맞어 더 이상 못 편해져그냥.

나 이십 대 때 느꼈어.

아, 이제 편해질 수는 없겠구나.

근데 그때는 그걸 알게 됐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편한 게 무지에 의한 편함인 거야.

그러니까 지에 의한 불편함을 선택할래 아니면 무지에 의한 편함 을 선택할래?

그러면 그럼 뭐, 당연히 조금이라도 아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니까 내가 이 정도까지 내가 불편하다는 걸 알면 그 안에 범위까지는 내가 편하다 뭐 좀 말이 좀 나도 폼 잡으려고 말을 하는 거긴 한데 근데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거든.

자, 생각해 보자.

내가 숨을 못 쉬겠어 숨진짜 숨을 못 쉴 정도로 너무 답답해 그걸 아무렇지 않은 척 찾는 게 솔직할까 아니면 뒤져버릴까 죽을 것 같애.

이렇게 말한 게 솔직할까 당연히 후자지.

근데 어쩌면 우리는 그런 거를 뭐랄까 참아야 한다는, 그게 그게 쿨하지 않다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집단적으로 강박관념혹은 내지는 강요를 당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오히려 내가 힘들다 힘들 때 힘들다.

내가 이렇게 막 이렇게 뒤질 것 같을 때 그렇게 될 것 같다라고 말을 하는 게 그래도 쿨한 거 아닐까?

이런거 보면 알 수 있죠.

자존감은 내가 높이고 싶다고 해서 높아지는게 아니라.

그냥 자연현상 같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부분이 있다는걸

추가칼럼

레드필 이론? 그딴거에나 신경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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